혹시 이런 일을 겪으셨다면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아래의 논의에 견주어 볼 자기 이야기를 지니고 계실 것입니다. 심정지, 대량 출혈, 큰 사고. 그리고 그 뒤에 결코 온전히 흐려지지 않은 어떤 또렷함, 온전히 이해받으며 바라보아졌다는 느낌, 돌아가기 싫었다는 마음. 그런 기억은 대개 유난히 정직하게 이야기되며, 그렇게 말해서 얻을 것이 없고 과장하지 않으려 애쓰는 분들이 들려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그런 분을 거짓말쟁이나 미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라고 부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래에 이어지는 조심스러움은 하나의 체험이 무엇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하는 물음과는 다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말씀드리자면,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기에 알맞은 자리는 글이 아니라 나를 아는 사제 앞입니다.
보고들이 묘사하는 것
현대의 논의는 1975년 레이먼드 무디의 Life After Life(삶 이후의 삶)에서 시작되었고,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작업과 칼리스 오시스 및 에를렌두르 하랄드손의 연구가 뒤를 이었습니다. 무디는 되풀이되는 요소들을 모아 하나의 합성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사망 선고를 받는 소리를 듣는 것, 몸을 떠나 그 방을 내려다보는 느낌, 흔히 터널이라 묘사되는 어두운 공간의 통과, 이미 세상을 떠난 친지들과의 만남, 빛나는 현존, 자기 삶의 빠른 회고, 그리고 마지못한 귀환입니다.
세라핌 로즈 신부는 이 문헌을 책 한 권을 쓸 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1980년에 나온 The Soul After Death(죽음 이후의 영혼)는 더 오래된 정교회 전거들이 이 현상을 어떻게 볼지 말해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는 실재하는 무엇인가가 보고되고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물음은 그것이 실재의 어느 영역에 속하느냐였습니다.
정교회가 다투지 않는 것
공통의 바탕이 얼마나 넓은지는 놓치기 쉽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영혼이 몸의 죽음 뒤에도 살아남으며 의식을 지닌다고 가르쳐 왔고, 그 책에 모인 교부들은 영혼이 육신에서 풀려나면 그 능력이 둔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날카로워진다고 논합니다. 영혼은 마중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6,22).
그러므로 정교회 독자는 몸 밖에서 의식이 있었다는 보고에 당황할 이유가 없고, 그것을 산소 부족으로 설명해 없애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어려움이 시작되는 지점은 그다음 주장입니다. 곧 환자들보다 오히려 대중적인 연구자들이 더 자신 있게 내놓는 주장, 이 이야기들이 모든 사람을 기다리는 바를 보여 주며 죽음에는 두려울 것이 전혀 없다는 주장입니다.
터널, 그리고 그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
세라핌 신부의 첫 반론들은 신학적이라기보다 방법론적인 것이었고, 꽤 잘 버텨 냅니다. 그는 무디의 합성 모형이 온전한 이야기가 아니라 짧은 발췌에서 조립되었으며, 서로 상당히 다른 것들을 하나의 모형에 밀어 넣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곧 실제 임상적 죽음과, 거기에 가까이 갔을 뿐인 상태를 함께 묶었다는 것입니다.
터널이 그가 든 예입니다. 터널에 들어가는 느낌은 에테르 마취를 받은 사람들도, 죽을 위험이 전혀 없던 사람들도 보고합니다. 자기 삶의 빠른 회고 역시 물에 빠질 뻔했다가 아무 일 없이 회복한 사람들이 보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좀 더 일반적인 어떤 체험에 속하고 죽는 일 자체와는 부수적일 수 있습니다. 소박한 지적이지만, 그 전체 과정을 이 생을 떠나는 통로의 단일한 지도로 다루는 습관을 허물기에는 충분합니다.
빛의 존재
무디가 가장 깊은 요소라고 부른 것은, 따뜻함과 이해로 가득한 인격적 현존으로 알아차려지는 빛의 나타남입니다. 그 빛은 말 없이 소통하고, 죽어 가는 이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면서도 어떤 판결도 내리지 않습니다. 무디 자신도 이 존재를 무엇이라 부르는지는 그 사람의 종교적 배경에 달려 있다고 적었습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라 하고 어떤 이는 천사라 하며 어떤 이는 그저 현존이라 하는데, 그 자체로는 알아볼 만한 형태가 없습니다.
세라핌 신부는 단정이 아니라 비교로 답합니다. 정교회 전거에 나오는 천사들은 그 모습에서도 하는 일에서도 이보다 훨씬 뚜렷합니다.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에서처럼 눈부시게 흰옷을 입은 젊은이의 모습으로 오고, 영혼의 팔을 단단히 붙들어 어딘가로 데려가며, 멈추어 서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형태가 없으면서 길게 대화를 나누고 삶의 회고를 상영해 주는 현존은 그 묘사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따뜻함만 보고 그것을 천사라 부르기를 사양하면서, 사탄도 빛의 천사로 모습을 바꾼다는 사도의 경고를 떠올립니다(2코린 11,14). 다만 그는 단정으로 문제를 끝내기보다, 이기기에 바쁜 저술가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먼저 합니다. 곧 물음을 지면 위에 그대로 남겨 둡니다.
“이 ‘빛의 존재들’은 누구인가 — 아니, 무엇인가?”
세라핌 로즈 신부, The Soul After Death(죽음 이후의 영혼), 제1장 3절 (알래스카의 성 게르만 형제회, 2009년 인쇄본)
영들을 분별함
여기에서 이 논의는 1970년대보다 훨씬 오래된 무엇과 이어집니다. 교부들이 모든 놀라운 종교 체험에 적용하는 규칙은 사도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분별하십시오(1요한 4,1). 기준은 체험의 강렬함이나 그것이 남긴 좋은 느낌이 아닙니다. 수덕 저술가들은 이 규칙을 적용하지 못하는 것을 프렐레스트, 곧 영적 미혹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악하다고 내세우는 속임수라면 아무도 속이지 못할 것이라는 데 한목소리를 냅니다.
세라핌 신부가 연구자들 자신의 추론에서 짚어 낸 약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디는 속임의 가능성을 제기했다가, 악마적인 환영이라면 아마도 증오와 파괴를 권할 것이라는 이유로 곧 물리쳤습니다. 교부 문헌은 그 반대를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유혹은 좋은 것의 옷을 입고 찾아오며, 그래서 성인 전기에는 임종을 맞는 수덕자들이 위로가 되는 환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야기가 그토록 많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누군가의 체험에 대한 판결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체험 위에 교리를 세우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이런 보고가 입증할 수 있는 것
세라핌 신부의 결론은 그에 대한 평판보다 훨씬 절제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들이 영혼이 몸 밖에서 살아남는다는 사실과 비물질적 실재가 있다는 사실 이상은 입증하지 못하며, 처음 몇 분을 넘어선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것을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연구가 그리스도인들이 이천 년 동안 배워 온 바를 확증해 주리라는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과장이라고 보았고, 무디 자신도 이 이야기들이 관습적인 그리스도교의 천국 그림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두 번째로 진단적인 논거를 내놓았습니다. 현대의 이야기에 없는 것이 있는 것만큼이나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데리러 오는 천사들, 심판이라는 감각, 그리고 더 오래된 전거들에 기록된 그 긴 시간이 없습니다. 옛 기록에서 그런 체험은 몇 분이 아니라 몇 시간 또는 며칠 동안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그는 현대의 보고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고 자연적인 방법으로 돌아오는 일이 아직 가능한 단계, 곧 죽음의 대기실에만 닿아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 모두는 논증이며, 그도 그것이 논증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책의 서문에서 그는 진술할 수 있는 교회의 가르침과, 당대의 특정한 보고들에 대한 자신의 독해를 구별했습니다. 후자는 자신의 것으로 내놓았고 반론이 있으리라 예상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들에 관해서는 정교회 신자들 사이에 정당한 견해 차이가 있을 여지가 있다.”
세라핌 로즈 신부, The Soul After Death(죽음 이후의 영혼), 서문 (알래스카의 성 게르만 형제회, 2009년 인쇄본)
가장 큰 반발을 부른 비교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대목은 제7장입니다. 거기에서 현대의 이야기들은 아주 다른 문헌 곁에 나란히 놓입니다. 『티베트 사자의 서』,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저술, 신지학의 아스트랄계, 그리고 20세기의 유체 이탈 안내서들입니다. 세라핌 신부는 그 닮음이 가깝다고 보았고, 여행자를 맞이하여 길을 안내하는 빛나는 인도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고 여겼습니다.
그의 결론은 하나의 영역과 하나의 해석 체계에 관한 주장이지,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들을 향한 고발이 아닙니다. 그렇게 읽는 것이 옳습니다. 그가 말하는 바는, 몸 바로 너머의 그 영역이 이전에도 묘사된 적이 있다는 것, 그것도 일부러 그곳을 찾아 나선 사람들에 의해 묘사되었다는 것, 그리고 현대의 보고들이 성인 전기에 기록된 환시보다 그 옛 묘사들에 더 잘 들어맞는다는 것입니다.
이 문헌에 대해 경종을 울린 것이 정교회 저술가들만은 아니었습니다. 세라핌 신부는 같은 시기의 복음주의 개신교 저자들을 인용하는데, 그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와 너무 쉽게 동일시하고 있으며 그것이 틀렸을 경우 알아차리기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비판이 그릇되었다기보다 자료가 부족하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 시험해 볼 무엇이 있다는 기본적인 직관에서는 그들과 그가 같은 편이었습니다. 다만 그 영역 자체에 대해서 그 자신의 문장은 단서 없이 단호합니다.
“이것들은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유체 이탈’ 체험이며, 특히 오컬트 문헌에서 잘 알려진 것이다.”
세라핌 로즈 신부, The Soul After Death(죽음 이후의 영혼), 제7장 결론 (알래스카의 성 게르만 형제회, 2009년 인쇄본)
자신의 체험을 어떻게 간직할 것인가
실제로 이런 일을 겪은 분에게 정교회 전통이 주는 사목적 권고는 한결같고 화려하지 않습니다. 본 것을 해석하고 가르쳐야 할 계시로 다루지 마십시오. 그것을 되풀이하려 하지 마십시오. 수덕 저술가들은 그런 상태를 일부러 붙들려는 태도에 대해 엄격합니다.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고 해서 이제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이 없다고 결론짓지 마시고, 무서운 체험이었다고 해서 자신이 단죄받았다고 결론짓지도 마십시오. 고해 사제에게 이야기하시고, 그다음에는 평범한 일들을 이어 가십시오. 기도, 고백, 영성체, 사람을 용서하는 일, 누군가를 돕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세라핌 신부 자신의 절제를 기억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쓴 것보다 훨씬 단정적으로 인용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대의 특정한 사례들에 대한 자신의 독해를 어디까지나 독해로 내놓았고, 정교회 신자들이 그에 관해 정당하게 달리 생각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의 독자들은 더 많은 점에서 더 크게 달리 볼 것이며, 그것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 문제를 정직하게 남겨 두는 자리입니다.
이런 종류의 기억을 지니고 계시다면, 정교회는 그것을 버리라고도 설명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자기 성인들의 환시를 포함해 모든 두드러진 체험에 요구하는 것을 이 체험에도 요구합니다. 곧 시험을 거칠 것, 겸손하게 간직할 것, 그리고 그 체험이 중단시키라고 주어졌을지도 모르는 회개의 삶을 대신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는 교정이 아니라 초대이며, 댓글창보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나누기에 더 좋은 이야기입니다. 싱가포르에 계시다면 오셔서 함께 나누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