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방에서 쓰인 책
196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 도심 근처의 지하 셋방에서, 한 젊은이가 책더미와 메모철로 덮인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방에는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사 오기 몇 해 전 그곳에서 살인이 있었고, 이웃들은 무언가 불쾌한 것이 여전히 그 자리에 감돈다고 말했습니다. 세입자는 한쪽 벽을 성화상으로 덮고 그 앞에 붉은 등을 켜 두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유진 로즈였습니다. 그는 얼마 전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수도사로 삭발하기까지는 아직 여덟 해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가 쓰고 있던 것은 방대한 저작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The Kingdom of Man and the Kingdom of God』(사람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이라는 제목의 열네 장짜리 연대기였습니다. 타자 원고로 완성된 것은 제7장뿐이었습니다. 그 장이 오늘 우리가 『Nihilism: The Root of the Revolution of the Modern Age』(허무주의: 근대 혁명의 뿌리)라는 제목으로 가지고 있는 책이며, 그의 선종 열두 해 뒤인 1994년 그의 형제회가 펴냈고, 표제면에는 “Eugene (Fr. Seraphim) Rose”, 곧 유진(세라핌 신부) 로즈라고 정확히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쓴 사람은 아직 세라핌 신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낱말이 실제로 뜻하는 것
이 낱말은 하도 많이 쓰여 닳아 버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말을 들으면 요란한 무언가를 떠올립니다. 테러범, 부서진 화랑,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하는 검은 옷의 청년 같은 것 말입니다. 로즈는 그것들을 먼저 치우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런 것들은 문제의 눈에 띄는 표면이지 문제 자체가 아니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 아래의 심성, 곧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훨씬 조용한 사람들도 만들어 내는 심성입니다.
정의를 얻기 위해 그는 철학적 허무주의의 원천으로 여긴 사람에게 가서 그를 직접 인용합니다. 니체의 문장은 이렇습니다. “진리란 없다는 것, 사태의 절대적 상태란 없다는 것 — ‘물자체’란 없다는 것. 오직 이것이 허무주의이며, 그것도 가장 극단적인 종류의 허무주의다.” 로즈는 우리 대부분이 같은 교설을 길들여진 형태로, 곧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문장으로 들어 왔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다음 자기 책의 모양을 결정짓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허무주의의 물음은 가장 깊은 곳에서 진리의 물음이다. 아니, 그것은 바로 그 진리의 물음이다.”
유진(세라핌 신부) 로즈, Nihilism: The Root of the Revolution of the Modern Age(허무주의: 근대 혁명의 뿌리), 제1장 「서론: 진리의 물음」(St. Herman of Alaska Brotherhood, 제2판, 2020)
말해질 수 없는 두 문장
이 책에서 가장 정신이 번쩍 드는 대목은 동시에 가장 짧은 대목이며, 누구나 확인해 볼 수 있는 평범한 논리 한 토막입니다. 두 진술이 널리 돌아다닙니다. 모든 진리는 경험적이라는 것, 그리고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로즈는 첫째 진술 자체가 경험적 진술이 아니라는 점 — 어떤 실험도 그것을 입증하지 않습니다 — 과, 둘째 진술 자체가 절대적 주장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각각은 말해지는 그 행위 속에서 스스로를 무너뜨립니다. 그 밖에 무엇이 따라 나오든 이것만은 따라 나옵니다. 진리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한낱 상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그는 더 넓은 귀결을 지닌 따름정리를 끌어냅니다. 어떤 지식 체계든 그 제1원리는 그 체계로 확립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체계가 거기서 출발하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원리는 미리 주어져야 합니다. 자연의 정합성과 균일성, 관찰에서 결론을 끌어내는 이성의 신뢰성, 한 사람이 아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알 수 있다는 전제 —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실험실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견지되며, 합리적으로 견지되지만, 말 그대로의 뜻에서 믿음으로 견지됩니다.
그는 여기서 조심스럽고, 우리도 그를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그는 과학을 공격하고 있지 않으며, 과학자들을 상대로 논쟁의 점수를 따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논증은, 어느 시대의 누구나 나중에 자기가 쓰는 방법으로는 증명되지 않는 무언가 위에 서 있다는 것, 그리고 흥미로운 물음은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의 믿음이 무엇에 기대고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네 단계, 그리고 첫 단계가 가장 조용하다
책의 본론은 로즈가 허무주의의 변증법이라 부르는 흐름을 따라갑니다. 네 단계이며, 각 단계는 앞 단계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부정에서 따라 나옵니다. 그는 그 단계들이 서로 겹친다는 것, 단순히 연대순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누구도 그중 어느 하나의 순수한 사례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두 가지의 혼합입니다.
이 가운데 첫째 단계를 그는 가장 길게 다루며, 그것이 독자가 들이마시고 있는 공기를 서술할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는 여전히 영원한 진리와 인간의 존엄과 그리스도교 문명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자리의 누구도 그 말들을 온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문명을 서술합니다. 그 말들은 언어의 장식이 되어, 그것들이 분명한 무언가를 뜻하던 시절의 기억을 불러올 뿐입니다. 부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뜻이 그저 떠나가도록 내버려 두었을 뿐입니다.
그의 네 단계 도식이 근대 지성사의 올바른 지도인지는 충분히 물어볼 만하며, 독자가 그것을 지나치게 깔끔하다고 여겨도 됩니다. 그 밑에 깔린 관찰은 물리치기가 더 어렵습니다. 노골적인 부정은 드물며, 믿음은 대개 장식으로 남겨짐으로써 죽는다는 관찰입니다.
- 자유주의 — 정당이 아니라 마음의 기질로서, 진리가 공격받지도 옹호되지도 않은 채 조용히 상 한가운데에서 밀려나는 상태. 옛 낱말들은 남겨 두고 옛 뜻은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 리얼리즘(실재주의) — 실재를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좁히는 것. 그리하여 그 밖의 모든 것은 장식이나 감상이 됩니다.
- 생기주의 — 진리가 포기된 다음, 진리 대신 생생한 체험을 놓는 것. 강렬함을 기준으로, 감정을 증거로 삼습니다.
- 파괴의 허무주의 — 질서 자체를 향한 노골적인 반전. 20세기는 그것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규모로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살아 본 나라를 서술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더 이상 논설이기를 그칩니다. 유진 로즈는 자기가 분석하던 상태의 구경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의 개신교 그리스도교를 얄팍하다고 여겨 거부했고, 서양 철학에서, 그다음에는 동양의 종교들에서 실재를 찾아 나섰으며, 아무것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는 문장들에서 전류가 느껴질 때까지 니체를 읽었습니다. 이성이 장애물이라는 생각에서 논리적 사고를 일부러 무너뜨리는 실험을 했습니다.
원고를 편집한 수도사제 다마스킨은, 한참 뒤 유진에게 그 시절을 설명해 달라고 하면 그저 지옥에 있었다고만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술을 마셨습니다. 바닥을 두드리며, 자기가 죽었다고 선언한 하느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한번은 취한 채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이 병들어 있듯 자기도 병들어 있다고 썼습니다.
그 문장이 이 책 전체의 어조를 여는 열쇠입니다. 그는 허무주의자 위에 서서 그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때 그러했던 무언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무신론자들에 관한 그의 후기 글에 보이는 묘한 너그러움을 설명해 줍니다.
그는 하느님과 맞붙어 씨름하며 그분을 불의하다고 고발하는 격렬하고 증오에 찬 무신론이 영적 상태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이며, 그것이 한 번 이상 무신론자가 실은 찾고 있던 그분을 뵙는 것으로 끝났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읽기에 위험은 결코 위대한 부정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조용히 한낱 낱말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변호도 성토도 아니게
로즈는 서두에서 잘못되는 두 가지 방식을 지목하며 자기 방법을 밝힙니다. 첫째는 성토입니다. 나치즘을 그 야만성 때문에, 또는 전위 예술을 그 비관주의 때문에 단죄하는 것인데, 그는 그것이 뿌리를 건드리지 못한 채 남겨 둔다고 봅니다. 오류는 오직 진리로만 무너지는데, 허무주의에 대한 비판의 대부분은 진리의 물음에 아예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 반대이며, 그는 그것을 더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그 끌림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허무주의자를 병든 문명의 피해자로 보기는 쉽고, 거기에 일리가 있음을 그도 인정합니다. 최악의 지성뿐 아니라 최선의 지성까지 허무주의로 돌아서는 시대는 분명히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감은 진단이 아니며, 그는 특정한 미끄러짐을 경계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도 피해자라는 이유로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온전히 무고한 피해자 같은 것은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 책은 모두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해 주는 편안한 책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일으키는 불편을 즐기는 책도 아닌데, 그쪽이 더 드문 일입니다.
“불행한 사람에 대한 공감이 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넘어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
유진(세라핌 신부) 로즈, Nihilism: The Root of the Revolution of the Modern Age(허무주의: 근대 혁명의 뿌리), 제1장(St. Herman of Alaska Brotherhood, 제2판, 2020)
참인가, 아니면 나에게 맞는가?
1962년의 책이 2026년의 독자에게 물음이 되는 지점이 여기이며, 그 물음은 누구를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갈림길일 뿐입니다. 어떤 종교에 관해 물을 수 있는 방식은 둘입니다. 하나는 이것이 참인가, 내 마음에 드는지와 무관하게 세계가 실제로 이러한가 하는 물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 나에게 맞는가, 나를 안정시켜 주는가, 내 기질에 어울리는가, 내가 사는 삶에 들어맞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둘째 물음이 사악한 것은 아니며 누구나 그것을 묻습니다. 로즈가 지목하는 문제는 한 문화가 첫째 물음이 물어진 적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진리가 상 한가운데에서 밀려나고 나면 종교는 하나의 선호로 살아남고, 선호는 들어맞는지에 따라 선택됩니다. 그렇게 붙든 신앙은 당신이 이미 원하지 않던 것을 당신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당신은 더 잘 맞는 것으로 바꿀 테니까요.
정교회 그리스도교는 독자에게 첫째 물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청하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말해 두는 것이 공정합니다. 하느님께서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총독 아래 사람이 되셨다는 것,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께서 세우신 교회가 그분의 가르침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물려주어 왔다는 것 — 이 주장은 그러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영성 양식으로, 또는 어떤 사람들이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일련의 실천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전통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확신에 대해 똑같이 말할 것이며, 그렇게 말할 때 그들은 로즈가 마음에 두었던 물음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공통의 땅이며, 대개 받는 것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허무주의를 넘어
마지막 장은 근대인의 낙관적인 판본으로 향합니다. 이상주의자들, 미개척지를 밀어붙이는 과학자들, 평화와 형제애를 위해 일하며 미래를 확신하는 젊은이들입니다. 로즈는 그들을 진지하게 대하며 비웃기를 사양합니다. 그의 비판은 좁고 구체적입니다. 그들의 믿음과 희망은 온전히 이 세상을 향하고 있는데,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은 지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끝나 버릴 것들에 온전히 걸린 희망은 그것들이 끝날 때 살아남지 못할 희망입니다.
그에 맞서 그는 역설처럼 들릴 줄 알면서도 하나의 뒤집기를 내놓는데, 자기에게도 나름의 허무주의가 있다는 비난을 살 수 있음을 알기에 거의 미안해하는 투로 꺼냅니다. 그리스도인도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허무주의자라고, 다만 반대 방향으로 그러하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차이는, 한쪽의 무(無)는 심연에서 나오고 다른 쪽의 무는 충만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가난을 허무주의라 부르는 것은 사실 문학적 장치일 뿐이며 그것이 실제로는 충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독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경고를 덧붙이는데, 그럼에도 그것은 그의 논증 전체의 논리입니다. 인간의 정신은 비어 있는 채로 머물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끝내 적그리스도를 믿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결론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제 — 아무것도 믿지 않는 데 실제로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는 전제 — 는 반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끝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며, 하느님이 모든 것이다.”
유진(세라핌 신부) 로즈, Nihilism: The Root of the Revolution of the Modern Age(허무주의: 근대 혁명의 뿌리), 제5장 「허무주의를 넘어」(St. Herman of Alaska Brotherhood, 제2판, 2020)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읽을 것인가
『Nihilism』은 그의 가장 어려운 책이며 시작하기에 알맞은 책이 아닙니다. 초기작이고, 손보지 않은 원고이며, 후기 글과는 다른 방식으로 철학적이고, 그것이 나온 시절의 자국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라핌 신부 자신도 훗날 자기 초기 글들이 다소 추상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가장 따뜻한 상태로 만나고 싶은 독자라면 1981년 샌타크루즈에서 학생들에게 한 강연인 『God's Revelation to the Human Heart』로 시작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흔 쪽 남짓이고 대부분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책에는 후기작들에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방금 빠져나온 나라를 길이 아직 기억에 생생할 때 지도로 그려 낸 사람의 기록이며,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쓰였습니다. 그는 근대인이 먼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보기 전에는 — 그의 표현대로 자기 안의 허무주의를 마주하기 전에는 — 그리스도께 온전히 이를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이 책의 제안이며, 고발이 아니라 제안입니다. 끝내 참된 것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더 이상 살아 있는 물음이 아니게 되었다면,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다가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예배가 드려지던 샌프란시스코의 작고 어두운 성당에 이른 한 캘리포니아 사람의 책이 있습니다. 그 성당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대개 잠겨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