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주장되고, 무엇이 말해지지 않는가
정교회 사제에게 주일 아침 성찬의 잔 안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면, 그는 에두르지 않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답할 것입니다. 빵이 어떻게 빵이기를 그쳤느냐고 물으면, 그는 십중팔구 자기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며 교회는 그것을 알아내려 한 적이 없다고 답할 것입니다. 두 대답 모두 진지합니다. 첫째는 교회가 결코 누그러뜨리지 않을 신앙 고백이고, 둘째는 교회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거절입니다.
이 조합은 방문객들을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특히 종교라면 자기 주장을 설명하든지 아니면 축소하든지 하리라고 배운 이들에게 그렇습니다. 여기서 정교회는 둘 다 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진술하고 멈춥니다. 이어지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왜 멈추는 것이 회피가 아닌지, 그리고 왜 교회가 ‘어떻게’라는 물음을 ‘무엇’이라는 물음과는 다른 차원의 탐구에 속한다고 여기는지를 보이려는 시도입니다.
요한 복음 6장, 그리고 떠나간 제자들
이 이야기는 요한 복음 6장에서 시작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뒤 그리스도께서는 군중에게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RSV). 듣던 이들이 반발합니다. 그분은 그 말씀을 거두시지도, 다른 뜻으로 풀어 주시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네 차례에 걸쳐 더 강한 표현으로 되풀이하십니다.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정교회 독자들에게 결정적인 대목입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물러가고 더 이상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RSV). 제자들이 떠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가게 두시며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생생한 비유만을 뜻한 선생이었다면 그렇다고 말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담화를 보이는 그대로의 뜻으로 읽어 왔고, 그 뒤로 줄곧 성찬의 잔 앞에서 그것을 읽어 왔습니다.
잘못하고 있던 회중에게 쓴 바오로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에 보낸 첫째 편지는 주님의 만찬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이며, 그것은 꾸짖음입니다. 코린토 사람들은 그 모임을 부자들이 먼저 먹는 저녁 모임처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의 교정은 빵과 잔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닙니까?”(1코린 10,16, RSV)
거기서 그는 무언가 객관적인 것이 현존할 때에만 말이 되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합당하지 않게 먹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이며, “몸을 분별하지 않고” 먹는 사람은 “자기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7.29, RSV). 이어서 그는 바로 그 때문에 회중 가운데 더러가 약해지고 병들었다고 말합니다. 상징을 모독하는 일은 없고, 기념이 사람을 병들게 하지도 않습니다. 정교회는 이 경고를 무엇이 받아 모셔지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입니다.
성령 강림 기원: 변화를 청하는 기도
이 본당에서 대부분의 주일에 드리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찬예배에서, 아나포라의 중심 기도는 제정의 말씀 뒤에 옵니다. 부제와 사제가 머리를 숙이고, 사제는 모인 백성 위에 그리고 차려 놓인 예물 위에 성령을 내려보내 주시기를, 그리하여 빵을 당신 그리스도의 존귀한 몸으로, 잔을 당신 그리스도의 존귀한 피로 만들어 주시기를, 당신의 성령으로 그것들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회중은 세 번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그 청원의 모양새를 눈여겨보십시오. 그 건물 안의 누구도 자기가 그 변화를 일으킨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제는 회중 전체의 이름으로 청하며, 청하는 바는 성령의 활동입니다. 동정녀를 감싸시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바로 그 성령이십니다. 정교회 신학은 언제나 이 기도에 무게를 두어 왔고, 성령 강림 기원은 동방과 서방의 전례 사상이 여러 세기에 걸쳐 다르게 전개된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결과는 실제적입니다. 변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청해지는 것이기에, 교회에는 서술할 절차가 없습니다. 교회에는 청원과 응답이 있을 뿐입니다. 신자들이 보는 것은 빵과 포도주이고, 그들이 받아 모신다고 배우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그분은 모든 조각과 모든 방울 안에 온전히 그리고 통째로 계십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 그리고 각 입장이 지키는 것
정교회 밖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서 여러 입장을 지니며, 그 각각은 사도적 저술이 실제로 말하는 무언가를 지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가장 약한 형태가 아니라 가장 강한 형태로 제대로 펼쳐 놓을 가치가 있습니다. 희화화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그 가운데 하나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요약이지 반박이 아닙니다.
흔히 츠빙글리와 연결되며 복음주의 교회와 초교파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기념설은, 만찬을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기억의 행위이자 계약에 대한 충실의 행위로 봅니다. 이 입장이 지키는 것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단 한 번 영원히 바쳐진 그 한 제사의 충족성과, 은총은 예식으로 조종되지 않는다는 확신입니다. 그 배후에는 미신에 대한 정당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칼뱅을 따르는 개혁교회의 가르침은, 신자가 만찬에서 참으로 그리스도를 먹되 그분의 몸이 빵 속으로 내려오는 방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신자를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으로 결합시키심으로써 그렇게 된다고 봅니다. 이 견해는 두 가지를 동시에 지킵니다. 그 선물의 실재성과,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주님의 육신적 승천입니다. 빈약한 교리가 아니며, 이를 지니는 이들은 종종 만찬을 두고 깊은 경외심으로 말합니다.
루터교의 가르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참된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 안에, 함께, 아래에 주어진다고 확언합니다. 다만 루터교 신자들은 대체로 공재설이라는 명칭을 스콜라적 침입으로 여겨 거부합니다. 이 입장이 지키는 것은 식탁에서 하신 그리스도 말씀의 평이함입니다. 성공회의 신앙 문서들은 이 견해들 가운데 여럿을 동시에 담아 왔습니다. 정교회 밖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쓰면서, 세라핌 로즈 신부는 그런 이들을 낯선 사람 취급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완전히 남남으로 여기거나 이교도와 같다고 여겨야 할 이유는 없다
세라핌 로즈 신부, 1980년 11월 27일 편지. 수도사제 다마스킨, Father Seraphim Rose: His Life and Works(세라핌 로즈 신부: 그의 생애와 저작) 84장(St. Herman Press, 2003)에서 인용
정교회가 설명에 이르기 직전에 멈추는 이유
정교회는 이 모든 입장과 다르며, 그 차이는 사과 없이 진술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물이 변화된다고, 성령 강림 기원 뒤에 제대 위에 놓인 것은 무언가가 덧붙여진 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그리고 이것이 특정 영성체자의 믿음과 무관하게 참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은 기념설과의 실제 이견이며 개혁교회의 설명과의 실제 이견입니다. 예의 바름으로 녹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명하기를 꺼리는 정교회의 태도도 그만큼 단호합니다. 17세기 그리스 정교회의 신앙고백 문서들, 특히 1672년 예루살렘 교회회의에서 채택된 도시테오스 신앙고백은 당시 유포되던 개혁교회의 논변에 답하면서 메투시오시스라는 용어를 빌려 쓰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정교회 신학자들은 대체로 그 낱말을 실체와 우유(偶有)에 관한 라틴 스콜라적 분석의 승인으로 다루는 데 조심스러웠고, 신비라는 더 오래된 언어를 선호해 왔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이미 8세기에 그 어조를 정해 놓았습니다. 그는 신앙 해설에서 빵이 어떻게 몸이 되는가 하는 물음을 다루고는, 요지로 말하자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며 그 방식은 우리를 넘어서고, 하느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답합니다(『정교 신앙에 대한 정확한 해설』 IV.13). 성찬예배 자체가 그 예물을 “거룩한 신비”라고 부르는데, 이는 장식적인 낱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가 넘지 않기로 택한 경계선의 이름입니다.
그 경계선에는 신학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사목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원리는 논쟁하고 개선하고 방어하다가 끝내 그 자체를 믿게 될 수 있습니다. 신비는 오직 다가갈 수 있을 뿐이며, 그것도 금식과 고백성사와 준비라는 특정한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을 뿐입니다. 정교회는 만족스러운 이론을 갖춘 영성체자보다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영성체자를 더 바랍니다.
성찬의 잔이 모든 방문객에게 내밀어지지 않는 이유
정교회 본당은 보통 닫힌 성찬이라 불리는 관행을 지킵니다. 정교회 신자가 아닌 방문객은 예물을 받지 마시기를 청받습니다. 이 지점에서 가장 많은 상처가 생기므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고 무엇을 뜻하지 않는지 정확히 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방문객의 믿음에 대한 판결로 들리기 때문인데, 그것은 판결이 아닙니다.
정교회의 이해에서 성찬의 잔은 일치를 만들어 내는 수단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일치의 표지이자 인장입니다. 그 잔 앞으로 나아온다는 것은 자기가 이 교회의 신앙을 지니고, 이 교회의 규율 아래 살며, 이 교회의 성사를 고백하고, 이 교회의 주교와 친교 안에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일입니다. 아직 사실이 아닌 그 모든 것을 손님에게 행위로 말하게 하는 것은 참되지 않은 말을 하게 하는 것이며, 참되지 않을 뿐 아니라 친절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이 관행은 또한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2세기에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거듭남의 물로 씻김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로 사는 사람 외에는 누구도 성찬의 음식을 나누어 받도록 허락되지 않는다고 썼습니다(『제1호교론』 66). 여러 세기 동안 예비신자들은 아나포라가 시작되기 전에 이름으로 불려 물러갔고, 부제의 외침 “문을, 문을 지키라”는 지금도 성찬예배 안에 남아 있습니다.
정교회 신자들도 그냥 걸어 나오지는 않는다는 점 또한 말해 두어야 합니다. 성찬에는 준비가 앞섭니다. 정해진 기도, 전날 저녁부터의 금식, 그리고 러시아의 관행에서는 사전 고백성사입니다. 사십 년 전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십 년째 고백성사를 하지 않은 사람도 다른 누구와 똑같은 물음의 줄에 서 있습니다. 이 제한은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람이 하느님 앞에 어떤 처지에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로서 교회는 그에 대해 판정하기를 거절합니다.
정교회 밖에 있는 이들의 상태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세라핌 로즈 신부, 1980년 11월 27일 편지. 수도사제 다마스킨, Father Seraphim Rose: His Life and Works(세라핌 로즈 신부: 그의 생애와 저작) 84장(St. Herman Press, 2003)에서 인용
주일에 오시면 실제로 하실 수 있는 일
누구도 건물에서 돌려보내지지 않으며, 성찬예배에는 성찬의 잔 앞의 몇 분 말고도 훨씬 많은 것이 있습니다. 실제로 코반에 있는 저희 본당의 방문객은 아래의 모든 것을 아무런 어색함 없이 하실 수 있습니다. 주일을 추측으로 보내지 않으시도록 미리 알아 두시면 좋겠습니다.
성찬 때 자리에 그대로 있기보다 앞으로 나아와 축복을 받고 싶으시다면, 예배 전에 사제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 관습은 정교회 본당마다 다르고, 즉흥적으로 하기보다 미리 맞추어 두는 편이 수월합니다.
- 예배 전체에 머무르시고, 원하시는 자리에 서거나 앉으시고, 필요하실 때 나가셔도 됩니다.
- 이콘 앞에 초를 봉헌하시고 자기 말로 기도하십시오.
- 성찬예배 끝에 모두가 하듯이 앞으로 나아와 십자가를 공경하십시오.
- 안티도론을 받으십시오. 성찬의 어린양을 떼어 낸 바로 그 빵에서 잘라 축복한 것으로, 축성된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계 본당에서는 보통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에게 나누어 줍니다.
- 예배 후의 식사에 남으십시오. 싱가포르에서는 대개 강론이 받아 마땅한 것보다 참석률이 좋습니다.
- 이 글의 어떤 내용에 대해서든 영어로든 러시아어로든 사제에게 대화를 청하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
여기 서술된 이견은 진짜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식탁으로 같은 것을 뜻한다고 암시하며 글을 맺는다면 정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정교회의 입장이 그 신비를 풀어냈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성찬의 잔을 우월감을 느끼는 수단으로 쓰는 정교회 신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받아 모시는 것을 오해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캘리포니아의 개신교 가정에서 정교회로 온 세라핌 로즈 신부는 개종자들 사이의 바로 그 유혹에 맞서 글을 썼고, 그의 경고는 다른 어떤 주제 못지않게 이 주제에도 적용됩니다. 코반의 문은 주일 아침마다 열려 있고, 그 뒤에 나누는 대화에는 아무 대가도 들지 않습니다.
설령 신학적으로 올바른 말로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태도는 영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세라핌 로즈 신부, “In Defense of Fr. Dimitri Dudko”, The Orthodox Word 제2호(1980), 131쪽. 수도사제 다마스킨, Father Seraphim Rose: His Life and Works(세라핌 로즈 신부: 그의 생애와 저작) 84장(St. Herman Press, 2003)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