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이고의 한 소년
유진 데니스 로즈는 1934년 8월 13일 샌디에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에스더는 노르웨이계 집안 출신의 개신교 신자였고, 네덜란드와 프랑스 혈통인 아버지 프랭크는 로마 가톨릭 신자로 자랐다가 아내를 위해 개신교로 옮겼습니다. 프랭크는 한동안 과자 가게를 하다가 제너럴 모터스에서 일했고, 마지막에는 운동장 관리인으로 일을 마쳤습니다. 평범한 미국 가정이었고, 그 안의 신앙도 평범한 개신교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1952년 샌디에이고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당연히 과학이나 수학으로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남캘리포니아의 포모나 대학에 들어갈 무렵 그가 정작 원한 것은 진로 상담 교사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엇이었습니다. 직업이 아니라 답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끝내 말하려 하지 않은 시기
포모나에서 그는 어린 시절의 종교를 내려놓았습니다. 그것이 얄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그래서 대신 서양 철학에서 실재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 탐색은 1950년대 캘리포니아의 보헤미안 생활로 번졌습니다. 그는 문장들에서 일종의 전류가 느껴질 때까지 니체를 읽었고, 논리는 벽이고 비논리가 그 벽을 통과하는 문이라는 생각에서 일부러 평범한 이성을 무너뜨리는 실험을 했습니다.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초기 저술을 편집하고 훗날 전기를 쓴 수도사제 다마스킨은, 여러 해 뒤 유진에게 그 시절을 설명해 달라고 하면 그저 지옥에 있었다고만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술을 마셨습니다. 자기가 공공연히 죽었다고 선언한 하느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이 점은 분명히 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후기 저서들이 때로 아무것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람의 글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고, 그 의심은 그를 거의 끝장낼 뻔했습니다.
중국 철학, 그리고 그것이 그를 남겨 둔 자리
그는 번역자를 사이에 두지 않고 현인들을 읽기 위해 고대와 현대 중국어를 익힌 뒤, 1956년 동양어학 학위를 받고 포모나를 졸업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아시아학 아카데미에 등록했는데, 그곳 학장은 당시 영어권에서 선(禪)을 가장 널리 읽히게 해석한 앨런 와츠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의미가 있었던 스승은 더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유진이 그 전통의 참된 대표자로 여긴 중국 철학자 시엔 지밍이었고, 그와 함께 고대 한자에서 『도덕경』을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시엔 지밍에게서, 그리고 프랑스 저술가 르네 게농에게서 그는 결국 그의 생애를 결정하게 될 원칙 하나를 얻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조각들을 모아 사사로운 종교를 짜 맞출 것이 아니라, 한 종교의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형태를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961년 버클리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깊이 있다고 인정한 그리스도 이전 철학자들의 지혜는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 채 남겨 두었고, 그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러시아 성당
그는 학자가 어디든 가듯이 정교회 예배에 갔습니다. 전통 하나를 더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훗날 『사후의 영혼』(The Soul After Death) 말미에 실린 대목에서 그는, 그 러시아 성당에서 불교 사원이나 다른 동양 사원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무언가가 자기에게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마음속의 무언가가 여기가 집이며 탐색은 끝났다고 그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배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모르는 언어로 드려졌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다시 갔습니다.
성당 뒤편에 서서 관습을 익히며 여러 달을 보내는 동안 그에게 천천히 다가온 것은, 그의 모든 학업이 대비시켜 주지 못한 생각이었습니다. 진리란 애초에 지성이 찾는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인격적인 무엇, 나아가 한 위격(位格)이시며, 마음이 찾고 사랑하는 분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난 방식이었다고 썼습니다. 그는 1962년 2월 25일 탕자의 주일에 샌프란시스코의 러시아 「모든 슬퍼하는 이의 기쁨」 하느님의 어머니 대성당에서 정교회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스물일곱 살이었습니다.
요한 대주교
그 시절 샌프란시스코의 대주교는 요한 막시모비치였습니다. 상하이와 필리핀을 거쳐 온, 체구가 작고 등이 굽은 주교로, 앉은 채로 잠을 자고 맨발로 다녔으며, 생전에 이미 기적을 행하는 이로 여겨졌습니다. 교회는 1994년 그를 상하이와 샌프란시스코의 성 요한으로 시성했습니다. 유진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 대주교가 시내에서 신학 강좌를 열었을 때 유진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수석으로 마쳤습니다. 강의는 러시아어로 진행되었고 그는 그 방의 유일한 미국인 개종자였는데도 그랬습니다.
세라핌 신부의 후기 저술에서 가장 좋은 부분의 많은 것은 어떤 책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서 왔습니다. 스무 해 뒤 산타크루즈에서 학생들에게 강연하던 중, 요한 대주교의 무엇이 사람들을 그에게 끌어당겼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답은 언제나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랑했고,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내어 주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가 그에게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사랑하는 마음이라 불리는 것에게 주어집니다.”
세라핌 로즈 신부, God's Revelation to the Human Heart(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주시는 계시), 제2절 「계시」(St. Herman of Alaska Brotherhood, 제2판, 2014)
서점 하나와 활판 인쇄기 한 대
1963년 유진은 글레브 포드모셴스키라는 젊은 러시아인과 함께, 요한 대주교의 축복을 받아 알래스카의 성 게르만의 이름을 딴 형제회를 세웠습니다. 성 게르만은 1794년 발라암에서 코디악 섬으로 건너온 수도사이며 아메리카에서 시성된 첫 성인으로 꼽힙니다. 이듬해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 정교회 서점을 열었습니다. 1965년 1월에는 격월간 소책자 『The Orthodox Word』(정교회의 말씀) 창간호를 냈는데, 소박한 활판 인쇄기로 직접 조판하고 인쇄했습니다.
그 잡지가 이 사람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는 한 번도 직업 신학자가 아니었고 버클리 이후 어떤 교직도 맡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출판인이었습니다. 러시아어에서 성인전을 옮기고, 활자를 짜고, 교정지를 읽고, 그 결과물을 수백 명의 구독자에게 부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이 먼저 그곳에 연재로 실렸고, 상당수는 이름을 아는 독자들을 위해 쓴 글이었습니다.
플라티나의 숲
요한 대주교는 1966년에 선종했습니다. 그 계획에 대해 대주교의 축복을 받아 두었던 두 형제는 북캘리포니아의 오지에서 땅을 찾기 시작했고, 1969년 플라티나라는 작은 마을 근처의 외딴 산자락으로 인쇄 장비를 지고 옮겨 갔습니다. 1970년 10월 27일 두 사람은 수도사로 삭발했습니다. 유진은 러시아의 고행자 사로프의 성 세라핌의 이름을 따라 세라핌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글레브는 성 게르만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서품은 1977년에 이어졌습니다. 1월에 부제로, 4월에 사제로, 옵티나 스타레츠들의 제자였던 시애틀의 넥타리 주교의 손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사제이기도 한 수도사, 곧 수도사제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몇 해는 산에 오르며 찾으려 했던 고독이 아니었습니다. 편지가 자루째 도착했고 사람들이 찾아왔으며, 그는 그것들에 응답했습니다. 짧고 갑작스러운 병이 1982년 9월 2일 그를 데려갔습니다. 마흔여덟 살이었습니다.
개신교 독자가 그를 읽어 볼 만한 이유
정교회 저술가 가운데는 개신교 독자를 상당한 높이에서, 마치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며 외치듯 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라핌 신부는 그런 사람이 아니며, 그 이유는 그의 생애에 있습니다. 그는 그런 독자가 서 있는 자리에 서 본 사람입니다. 그는 개신교 가정에서 자랐고 그곳을 떠났는데,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거기서 찾았다고 믿은 것보다 더 실재하는 무언가를 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물려받은 신앙에서 걸어 나올 만큼 진리를 간절히 원하는 일에 무엇이 드는지를 안에서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끝내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개신교 신자로 남았고, 이 문제에 관해 그가 개종자들에게 준 조언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기대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1980년 11월 27일, 정교회 서적에서 마주친 험한 말들에 괴로워하던 한 예비신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녀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친척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고 그들과 좋은 사이로 지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큼은 공통으로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 자신의 가족과는 평화롭게 지내라”고 했습니다.
1979년 5월, 세례를 준비하던 또 다른 예비신자에게 그는 엄격하다는 그의 평판과는 어울리지 않게 들리는 한 문장을 써 보냈습니다. 사람이 대체 왜 정교회 신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그가 한 가장 꾸밈없는 말이며, 아마도 어떤 개종자에게든 — 나아가 그 자신에게도 — 적용할 수 있는 가장 공정한 시금석일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받으려고 정교회에 오는 것이며, 이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라핌 로즈 신부, 1979년 5월 3일 편지. 수도사제 다마스킨, Father Seraphim Rose: His Life and Works(세라핌 로즈 신부: 그의 생애와 저작), 제84장(St. Herman Press, 2003)에서 인용
그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 관하여
실무적인 문제 하나를 짚어 둡니다.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십 초도 안 되어 마주치게 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세라핌 신부는 널리 공경받고 있으며, 그를 “플라티나의 성 세라핌”이라고 적은 글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호칭은 교회보다 앞서갑니다. 그는 2023년 2월 조지아의 아할칼라키 교구에서 지역 차원으로 시성되었지만, 지역 시성은 더 넓은 교회를 구속하지 않으며, 그가 살고 봉직한 관할구인 러시아 국외 정교회(ROCOR)에서는 이 문제가 아직 열려 있습니다.
상황은 움직여 왔습니다. 2025년 12월 ROCOR 주교 시노드는 그의 생애와 유산과 공경을 연구하기 위해 소노라의 야고보 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설치했습니다. 2026년 5월에는 시노드가 시성 절차의 개시를 승인했다고 보도되었으나, 그 보도는 잠정적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글을 쓰는 2026년 9월 현재 이 문제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본당은 “세라핌 로즈 신부” 또는 “수도사제 세라핌(로즈)”이라고 적습니다. 그것이 그가 생전에 불린 이름이고 교회의 공식 문서가 지금도 그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 절차를 두고 일부 정교회 저술가들로부터 공개적인 비판도 나왔는데, 그가 떠맡지 않았던 주장들에 그의 이름이 갖다 붙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입니다. 현재 입장을 알고자 하는 독자라면 시노드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 페이지를 포함하여 어떤 웹 페이지든 다음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쓰였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결정되든 그 책들은 언제나 그래 왔던 그대로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결코 들여다보지 않는 곳까지 들어가 아주 힘껏 진리를 찾았고, 마지막에는 그 진리가 자기를 찾아냈다고 믿은 한 사람의 작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