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실천의 모습
토요일 아침에 정교회 본당을 찾은 분이라면 한쪽에 차려진 작은 상을 보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초 한 자루, 꿀을 넣어 달게 만든 삶은 밀 한 접시, 그리고 이름이 적힌 접힌 종이 한 장입니다. 이어지는 예식은 짧아서 십오 분쯤 걸립니다. 그것을 파니히다라 하며,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부릅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지난주에, 어떤 이는 사십 년 전에 떠났습니다.
이름은 성찬예배 전에 조용히 건네지기도 합니다. 빵을 준비하는 예식에서 사제는 살아 있는 이와 세상을 떠난 이의 이름마다 빵 조각을 하나씩 떼어 내고, 이 조각들은 나중에 그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기를 청하는 기도와 함께 성작에 담깁니다. 싱가포르의 저희 본당 같은 곳에서는 그 종이에 열 몇 나라와 여러 언어의 이름이 담깁니다. 그 예식 어디에도 그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었는지를 묻는 대목은 없습니다.
셋째 날, 아홉째 날, 마흔째 날
정교회의 기억은 처음 오신 분들에게 이상하리만큼 정확해 보이는 박자를 따릅니다.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 죽음 이후 셋째 날과 아홉째 날과 마흔째 날에 특별히 기도하고, 그 뒤에는 기일마다 기도합니다. 요한 막시모비치 대주교는 강론 「사후의 생명」에서, 마흔째 날에 영혼의 자리가 죽은 이들의 부활 때까지 정해지며 그때까지는 그 상태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숫자들은 작동 방식이 아니라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셋째 날은 사흘 만의 부활에 비추어 읽습니다. 아홉째 날은 천사들의 아홉 품계와 이어집니다. 마흔이라는 수는 그리스도께서 지키신 마흔 날의 금식과 승천 전의 마흔 날을 떠올리게 합니다. 대부분의 본당은 갓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 마흔 날 동안 성찬예배에서 날마다 기억하도록 마련합니다. 유가족은 이 짜임새를 자비로 여기는 일이 많습니다. 슬픔에 갈 곳과 할 일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라도니차와 위령 토요일
파스하(부활 대축일) 이후 교회는 한 주 반을 기다렸다가 부활을 무덤가로 가지고 나갑니다. 라도니차는 성 토마스 주간이라 불리는, 파스하 다음 둘째 주의 화요일입니다. 그날 정교회 신자들은 가족의 무덤을 찾아 파스하 성가로 죽은 이들에게 인사합니다. 그 이름은 기쁨을 뜻하는 슬라브어 낱말에서 왔습니다. 무덤에 음식과 술을 두고 오는 일은 교회의 뜻이 아니라 더 오래된 지역 풍습에 속합니다.
라도니차 곁에는 위령 토요일(부모 토요일)이 있습니다. 개별 가정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세상을 떠난 모든 이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러시아 관례에서 여기에는 육식 고별 주일 전 토요일, 대재기의 둘째와 셋째와 넷째 토요일, 성령강림절 전 토요일, 그리고 가을의 테살로니카의 성 데메트리오스 축일 전 토요일이 들어갑니다. 토요일은 일반적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지키는 날이며, 추도 예식이 대개 그날에 드려지는 까닭도 그 때문입니다.
파스하에 무덤을 찾는 일은 슬라브인의 발명이 아닙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묘지와 십자가에 관한 강론에서, 자기가 사는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이 파스하 다음 주간에 왜 성당을 떠나 성벽 밖 무덤 사이에 모였는지 묻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에게로 내려가셨기 때문이며 묘지는 본디 잠드는 곳이라 불리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가장 오래된 증거
이 관습은 그것을 뒷받침하려고 만들어진 어떤 논증보다도 오래되었습니다. 2세기의 묘비명은 읽는 이에게 묻힌 사람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167년경에 세상을 떠난 히에라폴리스의 아베르키오스의 비문은 이 글을 이해하는 이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청합니다. 로마의 카타콤에도 몇 마디로 새겨진 같은 청이 보입니다. 평화, 안식, 이름, 때로는 날짜입니다.
전례 본문이 곧 뒤를 잇습니다. 예루살렘의 성 키릴로스는 4세기에 새로 세례받은 이들을 가르친 「신비 교리 교육」에서, 교회가 잠든 이들을 기억하는 성찬 기도를 서술하며 그 봉헌이 그들에게 실제로 유익하다고 논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도 필리피서에 관한 세 번째 강론에서 거의 같은 말을 합니다. 두려운 신비 안에서 세상을 떠난 이를 기억하는 일은 사도들이 정한 것이며 빈 몸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방과 서방을 막론하고 고대의 모든 성찬 기도에는 그런 기억이 들어 있습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그리고 경전 목록에 관한 실제 차이
이와 관련해 가장 자주 인용되는 본문은 2마카 12,44-45입니다. 한 전투가 끝난 뒤 유다 마카베오는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금지된 부적을 몸에 지닌 채 죽은 병사들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리게 합니다. 기록자는 그 일이 부활을 내다보고 한 거룩하고 경건한 행위라고 칭송합니다. 이는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관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분명한 그리스도교 이전 유다교의 증언입니다.
여기에서는 실제 차이를 얼버무리지 말고 말해 두어야 합니다. 정교회는 사도들이 주로 인용하던 그리스어 칠십인역을 따라 마카베오기 하권을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옛 계약의 책들 가운데 하나로 읽습니다. 일부 정교회 저술가는 이 책들에 아나기노스코메나, 곧 '읽히는 책들'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이지만 성경에서 빼내지는 않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이를 제2경전이라 부릅니다. 종교개혁 교회들은 더 짧은 히브리어 경전 목록을 따랐고, 1611년 흠정역 성경이 그러했듯 '외경'이라는 제목을 단 별도의 부분에 실었으며, 뒷날의 신앙고백 문서들은 이 책들이 성경의 정경에 속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는 전해 받은 책 목록의 차이이지, 누군가의 잘못을 따질 일이 아닙니다. 또한 정교회의 실천이 이 한 대목에 달려 있지 않다는 점도 말해 둘 만합니다. 교회는 책 목록이 정해지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고, 마카베오기 하권이 아예 쓰이지 않았더라도 계속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전례가 먼저였습니다. 증거 구절은 대개 그렇듯 나중에 모였습니다.
많은 개신교 신자가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까닭
이 실천을 받아들이지 않는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부주의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며, 그들 대부분은 마카베오기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확신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신자가 하느님 앞에 서는 문제를 이미 해결했다면, 세상을 떠난 그리스도인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이미 온전히 주어진 것을 다시 청하는 일처럼, 더 나쁘게는 십자가의 일이 미완성이었다고 넌지시 말하는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지한 이유이며, 진지한 사람들이 지니는 생각입니다.
다른 세 가지 이유도 같은 존중을 받을 만합니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경전 목록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은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따른다는 히브 9,27의 무게인데, 많은 이가 이를 죽음의 순간에 사건이 종결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있습니다. 중세 말의 면벌부 거래가 바로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들러붙었고, 그 남용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혐오는 교리적이기에 앞서 도덕적인 것이었습니다. 16세기 자료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이해할 것입니다.
논쟁거리로 삼지 않으면서 눈여겨볼 만한 것이 또 있습니다. 추도 예식을 결코 청하지 않을 많은 그리스도인도 무덤 앞에서 자기 죽은 이에게 말을 건네며, 교리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서 그를 쉬게 하시기를'이라고 말합니다. 정교회라면 그 본능이 건전하며 그에 대한 반론보다 오래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론도 실제로 있는 것이고, 꾸짖음보다는 설명으로 답하는 편이 낫습니다.
“개신교 세계에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부드러운 마음을 지닌 이들의 본보기가 많이 있습니다.”
세라핌 로즈 신부, 단순함에 관한 강연, 1979년, 수도사제 다마스키노스, Father Seraphim Rose: His Life and Works(세라핌 로즈 신부: 그의 생애와 저작), 제87장 (St. Herman Press, 2003)
정교회 신자가 이 기도로 뜻하는 것
정교회는 기도가 지렛대처럼 하느님께 작용한다거나, 산 이가 죽은 이를 대신해 일정한 양의 고통을 갚아 준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에페소의 성 마르코스는 1438년과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정교회의 입장을 내놓으면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기도와 성찬과 자선 행위로 도움을 받는다고 확인하는 한편, 천국과 지옥 사이의 제3의 장소나 그 사이의 정화하는 불, 또는 죄가 용서된 뒤에도 남아 있는 벌의 빚 같은 것은 없다고 물리쳤습니다.
이 실천 뒤에 있는 것은 내세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교회에 관한 교리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몸이며, 죽음이 한 지체를 명부에서 지우지 못합니다. 정교회 신자가 성인들께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 청하면서 같은 숨결로 자기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까닭, 그리고 성령강림절 저녁기도의 무릎 꿇는 기도에서 교회가 지옥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까지 감히 청원을 드리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무덤에서 멈추는 사랑이라면 그리스도인이 명받은 사랑보다 작은 것이 될 터입니다.
열어 둔 문
개신교 가정에서 정교회로 온 미국인 수도사제였고 자기 친척과 아주 비슷한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쓴 세라핌 로즈 신부는, 이런 종류의 차이를 무기로 바꾸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관한 정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지켰고, 같은 편지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처지에 있는지 판단하는 일은 우리 몫이 아니라고 썼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 밖의 그리스도인들을 솔직하게 칭송할 줄도 알았고, 사석에서만이 아니라 공개적으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1979년의 한 강연에서 그는 따뜻함 없는 올바름도 여전히 그리스도교로 쳐 주리라 여기는 생각을 정교회 신자들에게 경계시키면서, 부드러운 마음이 선택적인 세련됨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기본임을 보여 주는 증거로 개신교 이웃들을 가리켰습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그 이름이 이곳에서 불리기를 바라신다면, 사제에게 그 이름을 건네시기만 하면 됩니다. 대부분의 본당에서 비용도 면담도 없습니다. 정교회 신자의 이름은 성찬예배 자체에서 기억되며, 정교회 신자가 아닌 분들에 대해서는 관례가 다르므로 여쭈어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의 습관은 기도하는 것, 계속 기도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마땅한 곳에 맡겨 두는 것입니다.
“정교회 밖에 있는 이들의 상태를 규정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세라핌 로즈 신부, 1980년 11월 27일 편지, 수도사제 다마스키노스, Father Seraphim Rose: His Life and Works(세라핌 로즈 신부: 그의 생애와 저작), 제84장 (St. Herman Press,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