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표현이 실제로 가리키는 것
사도전승은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추상적인 말로 들립니다. 정교회 주교 성성식에서는 다른 주교들이 그 사람을 둘러서서, 고개 숙인 그의 머리 위에 복음서를 펼쳐 얹고, 기도문이 낭독되는 동안 그에게 손을 얹습니다. 그 주교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주교가 되었고, 그들을 주교로 세운 이들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주교가 되었으며,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살아 있는 기억을 벗어나 여러 세기를 지나 사도들에게 닿습니다.
교회는 이 일을 한 사람이 해서는 안 된다고 언제나 못 박아 왔습니다. 『사도 교회법』으로 알려진 모음집의 첫 번째 법규는 간단히 이렇게 말합니다. “주교는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의 주교에 의하여 서품되어야 한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제4조는 가능하면 해당 관구의 모든 주교가 참여할 것을, 최소한 세 사람이 함께 모이고 불참한 주교들의 서면 동의를 받을 것을 요구하며, 최종 재가는 수도대주교에게 맡깁니다. 누구도 스스로를 주교로 세울 수 없고, 한 주교가 홀로 다른 주교를 세울 수도 없습니다.
이 세부 조항은 보기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주교는 무언가를 손에 넣어 사사로이 물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를 청한 특정 공동체를 위하여, 자기 것이 아닌 직무 안으로 주교단에게 받아들여지는 사람입니다. 교회법의 저 산술적인 조건마저도 사적 거래를 닮은 일체의 것을 막으려고 설계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안수
이 동작은 사도행전과 사목 서간 전체에 흐르지만 한 번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관습이 굳이 설명되는 법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열한 사도는 마티아를 뽑아 유다의 자리를 채웁니다(사도 1,15-26). 사도들은 기도하고 일곱 사람에게 손을 얹습니다(사도 6,6). 안티오키아 교회는 금식하고 기도한 뒤 바르나바와 사울에게 손을 얹어 파견합니다(사도 13,3).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교회마다 원로들을 세우고(사도 14,23), 티토는 고을마다 원로들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습니다(티토 1,5).
티모테오에게 보낸 두 구절이 가장 분명합니다. RSV 본문으로는 이렇습니다. “그대가 지닌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원로들이 그대에게 손을 얹을 때에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그대에게 주어진 것입니다”(1티모 4,14). 그리고 “내가 그대에게 손을 얹음으로써 그대 안에 있게 된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타오르게 하라고 일깨웁니다”(2티모 1,6). 무언가가 손을 통하여 주어진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티모테오 자신도 그것을 베푸는 일에 가볍게 굴지 말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아무에게나 서둘러 손을 얹지 마십시오”(1티모 5,22).
이 가운데 무엇도 증거 구절 나열로 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 시대 교회들의 평범한 결입니다. 물음은 다만, 그 결이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어지도록 의도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창립 세대에만 해당하는 특징이었는지입니다.
2세기가 당연하게 여긴 것
사도들 바로 다음 세대는 이 물음에 답하면서도 그것이 논쟁거리라고 여기는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1세기가 저물 무렵 로마에서 코린토로 편지를 쓴 성 클리멘스는, 사도들이 자기들의 첫 회심자들을 주교와 부제로 세웠고 그들이 죽으면 검증된 다른 사람들이 그 직무를 이어받도록 지시해 두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계승을 논증하고 있지 않습니다. 두 교회가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에 호소하고 있을 뿐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그나티오스는 107년 무렵 순교의 길을 가며 편지를 쓰는데, 도시마다 주교와 장로단과 부제들이 있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전제하고, 주교를 떠나서는 교회에 속한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교회들에 당부합니다. 그로부터 70년 뒤 리옹의 성 이레네오스는 『이단 반박』 제3권에서, 로마 주교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열거하고 사도 요한에게 배웠으며 이레네오스 자신이 소년 시절에 직접 그 말을 들었던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스를 가리키는 방식으로 영지주의 교사들을 상대합니다.
정직하려면 단서를 하나 달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장로’와 ‘주교’에 해당하는 낱말은 때때로 같은 사람들을 두고 쓰입니다. 사도 20,17과 사도 20,28을, 또는 티토 1,5와 티토 1,7을 견주어 보십시오. 그리고 주교·장로·부제의 삼중 직제가 얼마나 빨리 보편화되었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은 논쟁합니다. 정교회는 신약성경의 어휘를, 한두 세대 안에 교회들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에 비추어 읽습니다. 그 걸음이 너무 성급하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다면, 그분은 정당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교회가 전해진다고 믿는 것
전해지는 것은 사도직입니다. 곧 다른 성직자를 서품하고, 성찬예배를 주례하고, 사람들을 교회로 받아들이고 화해시키며, 교회가 언제나 가르쳐 온 바를 책임 있는 증인으로서 가르칠 권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함께 성령을 주셨을 때(요한 20,22-23), 정교회는 그분이 그 방 안에 있던 사람들보다 오래 남을 직무를 갖추어 주고 계셨다고 이해합니다.
이것이 무엇이 아닌지도 눈여겨보십시오. 성사에서 일하시는 은총은 주교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주교는 가득 채워져 있어 거기서 얼마쯤 길어 낼 수 있는 저수지가 아니라 청지기이며, 서품 기도문 자체가 그렇게 말합니다. 또한 주교는 추상적으로 서품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의 교구, 곧 이름을 가진 실제 사람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서품되며, 양 떼 없는 주교란 교회법이 규정하기조차 난감해하는 변칙입니다.
그러므로 계승은 마법의 사슬이 아닙니다. 전압이 전선을 타고 흐르듯 무언가가 자동으로 그 사슬을 타고 내려오지 않습니다. 주어지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위임이며, 그것은 교회의 생활 안에서 교회법 아래, 다른 주교들에게 그리고 자기 주교가 이상한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면 곧 알아차릴 신자들에게 책임을 지면서 수행됩니다.
전해지지 않는 것
개인의 거룩함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 점은 분명히 말해 두어야 합니다. 수많은 오해가 바로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유다도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였고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라고 파견받았습니다. 아리우스파에 속한 주교들도 누구 못지않게 적법하게 안수를 받았습니다. 네스토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였습니다. 성화상 파괴론자 총대주교들도 진짜 서품을 통해 진짜 교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중 여럿은 학식이 깊고 개인적으로는 엄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올바른 가르침도 자동으로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정교회는 그 계보 안에 서 있던 주교들을 폐위하고 단죄하고 파문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지니지 않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주교는 자기 머리 위에 얹혔던 손들에 의해 보호받지 못합니다. 교회의 대응은 그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계승이 지켜 주는 것은 직무이지,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교회의 주장을 혈통에 관한 주장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어떤 계보 안에 있다는 이유로 구원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계보가 하는 일은 훨씬 더 소박합니다. 그것은 주일 아침 코반의 한 홀에 모인 공동체와 1세기 예루살렘에 모였던 공동체 사이에 눈에 보이고 추적 가능하며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연속성이 있다는 뜻이고, 그 연속성은 확인해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개신교의 확신: 교리의 계승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 다수는 참으로 전해져야 하는 것은 사도들의 손이 아니라 사도들의 메시지라고 여기며, 그들에게는 곧바로 댈 수 있는 본문이 있습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씁니다. RSV 본문으로 “많은 증인 앞에서 나에게 들은 것을, 다른 이들도 가르칠 수 있는 충실한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2티모 2,2). 손 이야기는 없습니다. 가르침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사도들이 가르친 것을 더 이상 가르치지 않는 주교의 계보는 정작 중요한 유일한 의미에서 사도적이기를 그친 계보입니다.
이 논증은 진지하며 회피가 아닙니다. 정교회의 역사가 그 가장 좋은 증거 가운데 일부를 제공합니다. 4세기의 몇몇 구간에서 동방의 현직 주교 다수는 아리우스파이거나 반(半)아리우스파였고, 신앙을 지켜 낸 것은 폐위되어 유배된 아타나시오스와 아무 직위도 없는 수도자들이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손만으로는 아무것도 결판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는 독자는 그 사건을 정확히 읽은 것입니다.
이것이 개신교만의 별난 주장이 아니라는 점도 말해 둘 만합니다. 성공회와 여러 루터교회를 비롯한 많은 개신교 교회가 주교직을 유지하며 직무의 연속성을 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어느 정교회 주교라도 가르침이 버려진다면 직무는 무가치하다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이견은 흔히 쓰이는 요약이 암시하는 것보다 훨씬 좁고 훨씬 정밀합니다.
정교회가 둘 중 하나를 고르지 않고 함께 붙드는 이유
이레네오스가 실제로 어떻게 논증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의 적수들은 입문자들에게만 전해진 비밀스러운 사도 전승을 내세웠습니다. 그는 교리 대신 계보를 내놓는 방식으로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도들의 가르침은 공개된 것이며, 누구든 에페소나 로마나 스미르나에 가서 그곳 교회가 무엇을 끊임없이 배워 왔는지 확인할 수 있고, 주교들의 계승이야말로 그 확인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에게 계승이란 가르침에 대한 책임의 구조이지, 가르침을 대신하는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뒤집어 말해 보겠습니다. 교리에는 주소가 필요합니다. 사도적 가르침이 그것을 옳게 이해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전해지는 것이라면, 누가 그것을 옳게 이해했는가 하는 물음은 세대마다의 판단 말고는 판가름할 길이 없고, 같은 성경을 읽는 진실한 사람들도 서로 다른 결론에 이릅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공동체가 그 가르침을 맡고 그 가르침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주장은 확인 가능해지고 기준은 공적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정교회는 그 양자택일을 거절합니다. 신앙 없는 손은 아리우스파 주교를 낳고, 교회는 그를 폐위합니다. 손 없는 신앙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가르침을 낳고, 실제로 그것은 갈라집니다. 둘을 함께 붙들 때 하나의 주장이 성립합니다. 사도적 신앙을 전해 주는 교회는 끊김 없이 동일한 교회이며, 여러분은 직접 가서 그것을 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한 가닥이 더 있습니다. 주교가 서품을 주지만, 그는 사사로이 서품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주교 선출에는 교구의 성직자와 신자들이 참여했고, 회중이 외치는 환호 악시오스, 곧 ‘합당하도다’는 그들의 몫으로 지금도 예식 안에 남아 있습니다. 정교회가 주장하는 연속성은 한 줄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관통해 흐릅니다.
정교회의 입장을 에두르지 않고 말하면
문의하는 분들은 대개 이 모든 것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무엇을 함의하는지 알고 싶어 하며, 외교적인 답변이 아니라 솔직한 답변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정교회는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이며 성사는 그 안에서 주어진다고 여깁니다. 이는 최근에 굳어진 태도도, 러시아만의 특이한 주장도 아닙니다. 전통적인 입장이며, 개신교 가정 출신의 미국인 개종자였던 세라핌 로즈 신부는 그것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말했습니다.
정교회 안에서만 성사를 통하여 은총이 주어진다
세라핌 로즈 신부, 1980년 11월 27일 편지. 수도사제 다마스킨, Father Seraphim Rose: His Life and Works(세라핌 로즈 신부: 그의 생애와 저작) 84장(St. Herman Press, 2003)에서 인용
그리고 정교회가 안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도 에두르지 않고 말하면
바로 그 같은 편지에서 — 정교회 신자들이 자기 개신교와 가톨릭 친척들을 이단이라 부르는 것에 마음이 상한 예비신자에게 쓴 편지였습니다 — 세라핌 로즈 신부는 위의 문장 못지않게 정교회 입장의 일부인 한계선을 그었습니다. 그는 어떤 개인이 하느님 앞에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판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삶이 온전히 달라진 사람들을 자신이 직접 보았으며, 그들이 정교회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 체험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주장이 있고, 그 둘은 서로를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교회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성사가 어디에서 주어지는지에 대하여 분명한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날마다 성경을 읽으며 정교회 주교가 무엇을 위해 있는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웃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처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물음이며, 이 둘을 뒤섞은 탓에 큰 해가 있어 왔습니다.
개신교 배경에서 여기까지 읽어 오셨다면, 이 글의 어느 대목도 당신의 목사가 사기꾼이라거나 당신 할머니의 신앙이 헛된 것이었다고 결론 내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 글이 묻는 것은 더 좁은 물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공동체는 눈에 보이고 끊김 없이 이어지도록 의도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연속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와서 안쪽에서는 어떻게 보이는지 보십시오. 코반의 문은 주일 아침마다 열려 있고, 아무도 무엇에 서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정교회 밖에 있는 이들의 상태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세라핌 로즈 신부, 1980년 11월 27일 편지. 수도사제 다마스킨, Father Seraphim Rose: His Life and Works(세라핌 로즈 신부: 그의 생애와 저작) 84장(St. Herman Press, 2003)에서 인용